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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힘

literary note 2009. 2. 22. 04:57

얼마 전에 몇 몇 지인들과 함께 강릉에 다녀왔다. 욕망의 끝자락. 바닷가 여행이 항상 그렇듯이, 가는 동안 커져있던 흥분의 상쾌함은 막상 바다에 오니 지속하지 못했다. 파도처럼 혹은 오르가슴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다가 허무하게도 한꺼번에 꺼져버렸다. 어쩌면 내가 기대했던 흥분의 양이 파도의 무지막지함에 비해 너무 왜소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느낄 새도 없이 단숨에 내 가슴이 채워졌던 것이다.

경포대 바닷가를 잠시 거닐다가 바람이 심하게 불어 서둘러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을 들었다. 잡담과 함께 한 시간쯤 식사를 마치고, 바람 부는 바닷가로 다시 나왔다. 몹시 추웠기 때문에 어딘가 다시 들어가고 싶었지만, 색다른 곳에 왔다는 이유 때문에 의무적으로 조금 더 버티었다. 모래 위를 걷다가, 파도를 바라보다가, . . . 그러다가 들어갈 곳을 찾았다.

경포대 앞바다를 마주보고 오른쪽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높은 언덕 위에 멋진 호텔(현대비치호텔) 하나가 서 있다. 오래 전부터 경포대에 오면 매번 눈에 띄어 올려다 보았던 호텔이다. 간혹 밤이면 건물 위쪽에서 바다에 내리 비치는 불빛이 환하게 밝았다. 그 불빛은 바다 중간에 듬성듬성 돌출되어 보이는 작은 돌섬을 무대 조명처럼 비추었다. 호텔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의 넓은 창문에서 내려다 본다면 바다의 모습이 장관일거라고 항상 생각하곤 했다. 아마도 손님들의 시선을 배려한 호텔측의 서비스일 것이다. 아니,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일부러 호텔을 찾는 사람들을 감안했을 테니 서비스가 아니라 마케팅인 셈이다.

밤은 아니었지만, 점심을 마친 후 우리 일행은 그 호텔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일행 중 한 명인 L이 그곳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며, 가보지 못한 나머지 일행에게 소개 차원에서, 말하자면 인도를 한 셈이었다. 자동차로 언덕을 돌아 15미터 정도를 올라가니 바람결에 대나무 밭이 쏴-악 하며 출렁였다. 대나무 주변 여기저기엔 크고 작은 소나무들이 힘차게 솟아 올라 있었다.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작은 로비가 보였고, 그 맞은 편 후미진 곳에 안내 데스크가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여 종업원 두 세 명이 서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L이 앞장을 섰고, 나와 일행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다가 종업원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왠지 멋쩍은 자세가 되어, "숙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커피숍에 잠깐 갔다 나올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호텔이란 곳은 사유지이고, 데스크에서는 손님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일을 관리하는 곳이 아닌가? 더군다나 호텔은 숙박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므로, 숙박도 하지 않을 우리가 건물 안에서 얼쩡거리는 일이 그들의 눈에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호텔에서 보이는 바닷가 전망을 오래 전부터 상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올라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은 고급호텔이라는 장소에 대한 나의 이러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곳은 내게 아주 낯설고 어색한 곳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L은 종업원들이 있는 데스크로 가기는커녕, 그들을 무시한 채 입구 바로 옆에 있는 계단 위로 성큼 올라가 버렸다. 나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고, 얼른 그들의 눈을 피해 계단으로 따라 올라 갔다. L은 우리의 목적지인 커피숍이 아니라 호텔 2층에 있는 커다란 발코니를 찾았다. 그곳에 오면 으레 그렇게 해야 할 절차를 밟는다는 듯이, 마치 내가 영화관에서 그렇게 하듯이, L은 아주 익숙한 몸동작으로 평소보다도 자연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리를 작은 기쁨에 빠트릴 음모를 꾸미며 신이 나서 키득거리는 악동처럼.

유리문을 열고 바람 부는 발코니로 나오니 허옇게 밀려오는 파도와 시커먼 바위들이 저 아래에 펼쳐졌다. 내가 상상했었던 바로 그 탁 트인 광경이었다. 그 동안 강릉에 와서 한 번도 가져볼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시원스러운 쾌감이 밀려왔다. 밤이었다면 더 장관을 이루어 로맨틱 했을 것이다. 우리는 약간 고무되어 사진 몇 장을 찍고, 바다와 하늘을 몇 번 더 주시했다.

내 기억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텔이 세워진 언덕 바로 아래 쪽 해변에는 철조망과 돌담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군사시설처럼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과 철근 바리케이드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지날 때면 내내 우울한 느낌과 아울러 그곳이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와 발코니에서 보니 그 철조망과 바리케이드가 자취를 감추고, 마치 해방이라도 된 듯 시원한 백사장이 다 드러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바닷가 멀리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긴 방파제까지 개방이 되어 있었다. 약간 놀랐다.

내가 그 기억을 일행에게 얘기하자, 일행 중 한 명이 "아마도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의구심을 품었다. 처음엔 어이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현대기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현 정권"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수긍이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군사시설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공공 금지구역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그 호텔의 이름이 실제로 현대그룹과 관련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지만, 미관상 좋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케팅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오래된 철조망을 치우려면 틀림없이 어떤 억지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그게 바로 현대의 힘이에요!"

발코니에서 내려와 커피숍으로 갔다. 생각보다 커피값이 터무니 없이 비싸지는 않았다. 호텔, 고급 관광지, 리조트, . . . 내가 이러한 고급(?)문화에 낯설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내가 잘 몰랐거나 잘못 알았거나 혹은 나의 사회적 계급 탓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 "터무니 없음" 때문이다. 사회적 계급이란 그 터무니 없음에 대해 초연해 질 수 있는 힘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계급이란 그것을 묵인하거나 묵인하지 않거나의 문제이다.

커피를 마시며 넓은 창문 밖에 서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바다, 노을, 소나무, . . . 저녁이 되어 오렌지 색 노을 빛이 날카로운 나뭇잎 사이로 갈라져 창으로 들어왔다. 호텔의 커피숍에 있던 우리 모두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한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자연 경관조차 아무나 볼 수 없다면 서글픈 일일 것이다. 일행 중 누군가가 말했던 "현대의 힘"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 힘이란 어떤 힘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주눅 들지 않고도 통과할 수단을 거머쥔 몇몇에게만 쾌감을 허락하는 힘? 아니면 그 자신만의 쾌감을 누리는데 만족하는 힘? 바따이유(George Bataille)가 들었던 익살스러운 비유처럼, 다락방에 처박히어 혼자만의 샴페인을 홀짝거리는 힘? 그렇게 외롭고 적대적인 힘이 얼마나 강하고 지속적일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힘이었을까? 모두가 가고싶어 (물고기조차)그곳으로 향하는 강원도의 힘처럼, 경관을 보고싶어 하는 모두에게 철조망과 바리케이드를 거두어 쾌감을 주려는 보편적인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