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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 물질 간식을 위하여

literary note 2009. 3. 21. 10:00

잔기침 소리조차 허락되지 않아, 가뜩이나 작은 도서관 열람실이 우울하게 침체되어 있다. 여기 저기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지겨운 사람들. 군내를 삼키는 소리. 마치 자신들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다는 듯, 아니 그러길 바란다는 듯, 그들은 몇 시간 동안을 앉아 책과 펜을 쥐고 도를 닦으며 돌멩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도서관에는 소리 뿐만 아니라 냄새도 나지 않는다. 침묵의 공간에서 텍스트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침묵은 마치 블랙홀처럼 공간 전체의 대기를 빨아 마셔 버린다.

커피숍에서 뜨겁고 진한 원두커피 한 컵을 사 들고 열람실의 문을 연다. 발 뒤꿈치를 들고, 숨소리를 죽여, 내 자리를 찾아 조용히 착석한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고 책과 물건들을 꺼낸다. 열람실 안에서는 원칙적으로 음식물을 가져오면 안 된다. 커피는 가져올 수 있지만, 반드시 뚜껑을 닫아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저 돌덩어리들의 침묵과 잠을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뚜껑에 나 있는 작은 구멍으로 커피를 홀짝거린다. 커피는 원래 뚜껑을 확 열고 마셔야 한다. 코를 가까이에 대고 뿜어 나오는 커피 향과 수증기를 함께 들이마셔야 커피의 진정한 분위기를 마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향도 맡을 수 없고, 뜨거운 입 소리를 낼 수도 없다. 이곳은 감각을 삭이는 곳이다. 감각을 깨우지 않고도 사는 법을 연습하는 곳이기도 하다. 육체-물질에 생기가 돌지 않도록,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혼란스럽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곳에 오래 다니다 보면, 정말로 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쩐지 이들의 침묵이 짜증스럽고 화가 난다.

갑자기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홧김에 커피 뚜껑을 확 열어버리고 말았다.

야릇한 커피 향이 단숨에 방안 전체에 퍼지는 듯 하다. 사람들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에게 약을 올리듯, 나는 시치미를 떼고 살짝 소리를 내어 후루룩 거린다. 잠시 후 사람들은 뒤척이며 하나 둘 씩 일어나 가방을 뒤적인다. 지갑을 꺼내 들고는 자리를 비우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여자들이 더 심하게 동요하는 듯 하다. 뭔가가 되살아난 것이다. 잠시 후 그들도 잔을 들고 들어올 것이다. 감각! 축복인가? 저주인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천사 가브리엘이 대답해줄 수 있을까?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온 몸이 뻐근해지고 쑤셔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혹은 앉은 채로, 몸을 비정상적인 체형으로 늘이거나 줄이면서 뻐근함의 고통을 중화시킨다. 신비주의자들의 수련에 요가의 탄생도 바로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몸은 생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활동을 억제하고 정지한 채로 오랫동안 있으면, 몸의 생기와 몸의 물질이 서로 싸움을 벌인다. 전자는 움직이고 싶어하고, 감각을 느끼고 싶어하고, 흐트러지고 싶어하고, 한 없이 떠나고 싶어한다. 반면에 후자는 아버지처럼 이러한 요동을 불허하고 고집스럽게 훼방을 놓으며 생기의 발랄함에 그늘을 드리운다.

(엄밀히 말해 그 고집스러움은 물질 그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물질에 투사된 관념 때문이다. 책상 앞에 몇 시간을 앉아있게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어떤 관념적 필요 때문이 아닌가? 지식에 대한 욕구라든가, 취직에 대한 공포라든가, 아니면 행복과 같은 필요 말이다. 육체는 두 파벌로 나뉜 정신적 지대들이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싸움터일 뿐이다. 그 파벌의 한 편에는 생기가, 다른 한편에는 물질 혹은 물질화된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하여튼 몸이 쑤시는 이유는 생기와 물질 양자의 긴장과 싸움 때문이다. 물질이 승리를 한다면 우리의 몸은 돌처럼 굳어져가며 팔다리와 어깨의 근육에 딱딱한 몽우리나 굳은 살이 박힌다. 물질의 승리가 더 지속될수록 몸의 생기는 점차 정체되어, 급기야는 생기의 정수랄 수 있는 정신조차 그 발랄함과 활력을 잃어버린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가끔씩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고, 산책을 하고, 특히 간식을 먹는 것이다. 물질의 스트레스를 강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뒤척임과 간식의 양이 많아진다. 이는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정체상태로 이끌 것이다.

문제는 간식이다. 산책과 운동은 많이 할 수록 좋을 수 있지만, 간식은 많이 먹을수록 우리의 생기 쪽 보다는 물질 쪽에 더 영향을 주므로, 결국 많은 간식은 물질을 강화하든가 아니면 비대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어져 완전한 정체라고 할 수 있는 수면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간식을 먹지 않을 수는 없다! 한 잔의 진한 커피, 한 두 조각의 치즈 케이크, 기름 잔뜩 묻은 야채 튀김, 시뻘건 떡볶이, 지독한 냄새의 순대, . . . 이런 불량식품(?) 없이 인생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간식이 불량하면 불량할수록 느껴지는 감각의 맛은 더 짜릿하고 감미롭다. 돌처럼 뻣뻣해진 우리의 몸에 저토록 통쾌하게 반항하고, 반복에 지배된 지루한 일상에 저토록 쾌활하게 반란을 일으키는 물질들이 또 있을까? 그들 앞에서는 산책과 운동의 건전함이 왠지 성직자들의 미소처럼 위선으로 보일 정도이다. 저 간식들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의 탈을 쓴 생기가 아닐까? 젊은이들이 더 많이 좋아하고 더 친화력이 있어 보이는 까닭에, 아주 말이 안 되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건강 운운하는 주장은 궁색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간식 산업이 발전해야 한다. 우리 몸의 물질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신(新)물질로 이루어진 간식들이 새롭게 쏟아져 나와야 한다. 우리의 정체된 감각에 활력을 주되, 몸을 정체된 상태로 빠뜨리지 않는 그런 간식이 많아져야 한다. 아무리 먹어도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과용에도 중독이 되지 않도록. 무엇보다도 먹을수록 지겨워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생기가 고집스런 물질을 닮아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