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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하기와 폭로

literary note 2009. 11. 7. 01:55
현재 브레히트(Bertold Brecht)식 낯설게 하기의 가장 좋은 소재는 상품이 아닐까? 상품은 너무나 친숙해졌고, 아름다워졌고, 편안해졌고, 신비스러워졌다. 포스트모던 브레히트는 상품의 이 허울을 벗겨내기 위해, 이들의 구성요소들, 부속들, 쓰레기로 만들어지는 실체들, 그 조잡하고 무의미한 성분들과 관계들에 대한 가차없는 폭로가 필요해 보인다. 예술가들은 상품을 해부하고(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날 재료들을 가리거나 그들을 봉합하는 거친 재봉선을 들추어내고, 속을 보여주고, 창자들을 빼내어, 그 날 재료들을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이지 않는 옷처럼 걸치고 있는 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물건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자신들의 등판과 어깨에 무엇을 걸치고 있는지, 기업이 들추어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물건들에 대한 관심과 취향과 흥미를 떨어뜨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작은 예로, 얼마 전에 일부 영리한 젊은 층이 문화-경제적으로 시도했던 특정 기업 상품불매 광고 운동에 대한 기업과 사법부의 흥분된 반응을 보라. 우리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를 발견한 셈이다). 고다르(Jean Luc Godard)가 영화를 감동적이지 않은, 재미없고 시시하고 엉성하고 부산하고 산만하고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예술 자신을 재미없게 할 것이 아니라, 상품과 그 이미지를 시시하게 만드는 일, 이것이 예술가들이 (무엇보다도 그 자신들을 위해) 해야 할 현대적 과업이 아닐까?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뭉클하게 만드는 예술가들은 가짜이며, 점점 더 마취되기를 원하는 관객들과 아울러 함께 놀아나고 있는 공범자이다. 앤디워홀(Andy Warhol)? 물론 그는 상품을 신비화한 장본인이다. 그는 한 꺼풀만 벗겨내면 쓰레기가 되었을 그 무엇들에 대해 아무도 그 한 커플을 벗겨내지 못할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 얇은 가리개를 이용하여 아우라를 재구축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영리한 사기꾼이었지만, 현대의 예술가가 필요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사기꾼 근성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품의 아우라는 파괴되어야 하지 않는가? 브레히트나 고다르의 방식이 옳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술은 자기자신을 망가뜨리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기를 지시하고, 자기를 반영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아무도 신뢰하지도 흥미로워하지도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 괴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교화는 행동과 결단을 촉구하지 못한다. 그것은 윤리적으로도 조차 지속되기가 어렵다. 인간이 돼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돼지가 인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이 돼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 지성이란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브레히트는 이성을 일깨워 행동을 촉구했지만, 실은 이성은 행동을 방해한다. 서사극보다는 오히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지적처럼 멜로드라마가 더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중을 교육시키려는 생각보다는, 그들에게 네가 본 것을 폭로하라! 도덕과 집단적 정의에 호소했던 미국의 전 근대적 저널리즘식 폭로(muckrakers)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 취향과 쾌락에 호소하는, 폭로의 예술, 폭로의 기교가 필요한 것이다. 낯설게 하기가 예술의 형식으로서 아직도 유효하다면, 교화가 아닌 폭로를 위한 것이 되도록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