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

  1. muse 2015.02.22 22:03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놀랐어요~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지금 세미나하고 있고
    프루스트 작년에 세미나하구~
    그냥 공부로하고 있는데~들뢰즈에 대해서 책까자 내셧네요~
    제가 멜한번보낼게요~

  2. muse 2015.02.22 21:58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진짜 반가워요~예전시간강사이야기의 muse입니다.들뢰즈 공부히다가 이 사이트에 오게되었어요~십년도 더 전에 한번뵈었나?^^기억도 가물가물...
    그 사이에 정말 훌륭한 학자가 되셧네요~

    들뢰즈 매력있는 철학자여서 이년정도 공부하고 있어요^^그 사이 박사 학위도 따시고~저는 포기했는데요ㅠ

    늘 건강히 잘 지내시길 바래요~

  3. choo 2014.12.09 20:08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성훈 선생님, 메일 체크 부탁합니다. 답메일 주세요

  4. 228 2014.07.25 14:34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회화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들뢰즈에 대해 검색하다보니 이 사이트를 알게되었는데 선생님의 글이 너무 좋아 글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다보니 24페이지까지 읽어가는 중입니다.
    읽던 중에 선생님께서 시각디자인과 들뢰즈가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주름(fold)라고 하셨는데, 이유가 알고싶어 개인적으로 안부글을 남길겸 질문해 봅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읽고 공부하듯이 노트에 좋은 구절을 써보고 있습니다.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마음이 차분해진 것이 선생님 덕분입니다. 최근 나무를 잘라가면서까지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소재를 가지고 글을 써주셨는데 본질에 대한 이해라니, 말로 표현을 잘 못하는 저에게 늘 명쾌하게 글로 답을 내려주십니다.
    좋은 글 계속해서 써주시고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__^

  5. mikwa 2012.01.11 12:19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들뢰즈의 잠재론이란 선생님 책을 얼마 전에 읽었습니다. 꽤 내용이 방대했지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통 영어와 불어 두 개로 번역 용어를 놓아 두시는 것을 봤는데요,여기서 궁금중은 선생님은 주로 영어 번역본으로 텍스트를 삼은 것 같더군요. 저는 학문이 깊지 못해 어떤 한 명의 철학자 전공을 할 때 그 사람의 모국어 텍스트를 정독하지 않고 전개가 가능한지 그냥 궁금증이 있습니다.근데 이건 부차적인 질문이고요. 제가 정리를 하다 보니 허구의 번역으로 la fabulation story-telling이라고 되어 있던데, 뭔가 앞과 뒤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의구심이 일어서 검색을 해봤는데, 선생님 블로그를 만나게 됐습니다. 거기에는 스토리텔링 뒤에 function이 붙는 용어를 발견했는데, 어떤 게 맞는 건지요. 책의 오타가 아닐까 싶어서 문의드립니다.그리고 저는 잘은 모르지만 예술 쪽 관련 일과 공부를 하는데요. 선생님(선생님이란 표현을 개인적으로 잘 안쓰는데 어떻게 지칭할지를 몰라서요.)의 해박한 지식과 글에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들뢰즈의 책 중에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책이 이쪽 동네 사람들과 애기해보면 천개의 고원 같던데요. 거기에 대한 레퍼런스가 들뢰즈의 잠재론에는 별로 없어서 약간 아쉽습니다. 천개의 고원에 관해서는 또 다른 레퍼런스들로 책을 엮을 생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천개의 고원은 어떤 책인가요. 너무 두꺼워 아직 엄두 못내고 있는 책입니다. 주로 잠재론 책에서는 베르그송과 후반부에 오면 네오리얼리즘 영화 언급이 많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베르그송 이야기인지 들뢰즈 이야기인지 헷갈리는 부분, 또 변별안되는 부분도 있어 책 읽는 데 애로가 있었습니다.네오리얼리즘 영화를 한번 다 찾아 봐야되는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아무튼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블로그에 글들은 오히려 책보다 명쾌하고 더 읽기 수월한 것 같네요. 또 하나는 은유의 개념이 하나는 형용사 차원에서 쓰일 때 본질의 의미 내지는 사물을 곡해하는 것 같은 걸로 제시하셨다가 후반에는 은유-질적 공명-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 같아 이에 대한 혼동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 은유와 환유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 궁금해요. 정신 분석 차원에서도 두 단어는 개념화될 수 있는 것 같고, 환유가 직접적인 신체와 맞닿는 측면이 있어 사진도 환유에 속하고, 그래서 긍정적인 함의로 말을 했던 분의 기억이 있어서요. 그런데 얼마전에 가스통의 책에는 은유 자체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이라...
    그리고 또 하나는 문학과 영화는 보통 예술학 하시는 분들의 주요 텍스트가 되는데, 왜 공연은 그렇지 않은지 궁금해요. 공연의 잠재성들을 담고 있는 책들, 지적 레퍼런스들을 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질문이 길어 죄송합니다.

    • Favicon of http://literarystudy.kr BlogIcon huun 2012.01.15 16:41 신고  수정/삭제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질문을 해주셨군요.
      불어든 영어든 한국어든 잘 읽으면 되죠^^
      물론 저자의 모국어 텍스트를 읽으면 가장 좋겠죠. 그러나 어떤 경우든 외국어를 읽는 독자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들이 있습니다. 들뢰즈 자신도 불어 뿐 아니라 독일이나 영미쪽 텍스트를 언급하지만, 정작 들뢰즈 자신은 영어나 독어를 잘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계가 있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철학을 부정할 수는 없겠죠. 다른 문제니까요.
      제 책의 서문을 잘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초의 책의 계획은 들뢰즈의 다른 텍스트들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차이와 반복이나 천개의 고원 등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지면과 시간의 한계로 그 모든 방대한 텍스트를 다루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서둘러 책을 내야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서 중간에 완성된 원고를 중심으로 출간을 하게 된겁니다. 물론, 그 이후에 작업을 하고는 있지만, 후딱 처리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요. 제 관심은 들뢰즈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를 읽어야 할지도 아직 망설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의 영화이론을 집중해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책을 출간할 계획에 있습니다.
      물론, 천개의 고원은 위대한 책입니다. 베르그송주의에 감싸여 있던 배아가 현실적 환경 속에서 산종(dissemination)된 것 같은 느낌을 일으키는 책입니다. 방대한 자료와 예들이 풍부한 책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문예노트>에 올린 글들은 가급적이면 쉽고 짧고 명쾌하게 쓰려고 합니다. 메모해 두었던 단상이나 에세이를 중심으로 말이지요.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질문에 대답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무쪼록 좋은 독서경험 하시길 바랍니다.^^

  6. Uebermensch 2011.05.14 22:58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아래 예술의 방향성 이야기가 나와 잠깐 눈길이 가는데

    제 추측으론 glorious sound님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예술의 스펙트럼이 현저히 넓어지면서 생기는 모종의 부작용을 경험하신듯

    소음과 다를게 없어보이는 음악이나 외설과 예술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글 그리고 공연

    시각적인 혐오감을 주는 이미지, 뭐 예를들어 HR Gigger의 작품같은

    저도 종종 g.s님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사는데 예술가나 예술가 집단은 이런 류의 부작용들에 대해

    어떤 솔루션 내지는 책임감을 갖고 작업에 임하는지요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으레 말하듯 '자기 하고싶은걸 하는건지' 전 이게 예전부터 궁금하더군요

    주인장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요즘 예술 작품이란게 꼭 전시장 안에만 있고 책을 펴야만 나오는것이 아닐텐데

    더구나 전문가가 아닌 다수 일반인, 그러니까 렘브란트, 제인 오스틴, 모차르트같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정제된 작품들만을 섭취할수 있었던 일반인들에게

    요즘 예술작품들은 뭐랄까

    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맥락이 삭제된 massive leap같은걸 요구하는듯..

    그리고 언제나 중요한 화두인 '새롭다'는 것..

    예로 니체의 책 Menschlisches Allezumenschlisches(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에서

    과거에 대한 존중역시 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산고 끝에 찾아낸 일종의 소통 방식인데도

    수많은 당대의 작가들이 불필요한 '독창광'에 시달렸다고 언급..

    알랭드보통 또한

    행복의 건축이란 책에서 이렇게 언급..

    '모퉁이를 돌때마다 사람들이 새로운것과 마주치며 놀라고 싶어하진 않는다는..'

    문예와 어느정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균형점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몇자 남겨 봅니다..

    • Favicon of http://literarynote.net BlogIcon huun 2011.05.16 16:15 신고  수정/삭제

      바로 그 책이었던 것 같은데, 오독에는 항상 크거나 자질구레한 정치적 냄새가 풍긴다고 니체가 말했던. ..
      새로움에 대한 예술가들의 의지와 열정(은유를 통해)이 과거에 대한 통찰이나 이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없이 현재나 미래가 불가능하듯이, 과거에 대한 이해 없이 새로움이 가능하지 않겠죠 . . . 주관성과 객관성이 그렇듯이, 새로움과 과거는 모순이 아니고, 오히려 상호기능적으로 서로를 지시하고, 서로를 발생시키고, 서로의 경첩, 뭐 그런 겁니다.

      니체 얘기를 하셨는데, . . 니체가 그 책 몇 번 아포리즘에서 그렇게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절을 찾아서 전후 맥락을 읽어가며 따져봐야 겠지만, . . . 니체의 그 책에서 예술에 관한 논의는 산발적이고, 한 가지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얘기 했다가 다른 얘기하고 그러기 때문에 예술론의 어떤 전범으로서는 적절치 않습니다. 물론 "진부한 새로움"이 있죠. 그러나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로움이라고 할 수 없고, . . . 그걸 솎아내는 것이 독자들이 할 일이겠죠.

      그리고 예술가들 얘기하는 겁니다. . . 매일 모퉁이를 돌아 출퇴근해야 하는 대중들 얘기가 아니고. . . (니체는 그 책에서 예술가와 대중의 차이에 대해 이에 참고가 될만한 얘기를 한적이 있죠) . . . 실제로 알랭드 보똥 역시, Romantic Movement에서 예술과 삶에 대해서 쓴 이야기에서, 무의미하고 진부한 일상에 뜻 깊은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했는데, 이 때의 그 "뜻 깊은 의미의 부여"란 다르게 말하면 새로움의 창조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건 새로움 뿐 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술가들이든 일상인이든, 새로움의 급류에서 허우적거리지는 않습니다. 피상적으로 사유하고 삶을 관념화하는 포스트모던 업주들이나 기업가들이 허우적거리죠. . 아니면 사람들이 허우적거리길 기대하죠. . . . 어쨌든 새로움의 질적 차이들이 있고, 추구하는 바 역시 다른 겁니다.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해서 곧바로 과거를 간과한다고 단순논리로 볼 수 없는 겁니다.

      포스트모던, 에일리언 이미지 등에 대해서는 그냥 pass 하고. . .
      예술가들의 사회적 책임이라, . . . 그러니까 그들이 책임감이나 솔루션이 있는지는 그들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죠 ^^. . . 그런걸 가지고 작업을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정치가들에게 요구하듯이, 그들에게 그런걸 요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어떤 경우엔 작업에 도움은 커녕 방해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참 말이 나온 김에, 과거가 소통의 매개이다? 어떤 과거? 어떤 소통?
      우리는 과연 어떤 과거로 소통하는가? 또 누구의 과거로 소통하는가? 우리는 소통할 수 있는 어떤 과거를 소유(공유)하고 있는가? 우리가 서로 알고 있고 공유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해, 우리는 서로 동일한 과거를 소유하고 있는가? 설령 그럭저럭 공유하고 있다고 쳐도, 그렇게 해서 서로 소통하는 소통이 진정한 소통으로서의 소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소통인가? 혹시 과거의 소통이 주먹구구식 소통은 아닐까? 이런 의문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소통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유형의 과거의 소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들어가겠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예술을 말해야 하니까요. . .

      어쨌든 고견 감사합니다.

  7. Glorious sound 2011.05.11 07:54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예술의 방향성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을 불신하거나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너무 소중한 '불쌍한' 예술가들을 제가 너그럽게 이해하지 못하는것을 보면 저도 불쌍한 것 아닌지.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나의 감성과 자아를 표현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것이 세상에 미치는 효과, 혹은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아프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이 좀 더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술의 정의에 위배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쨋든 저는 10년전의 문학이 지금의 문학과 별 다를바 없다고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만큼 문학을 깊게 알지는 못하니까요.
    그리고 모든것을 새롭게보고, 새로운 것에 갈급한 나머지,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는
    예술가들이 반드시 부지런해서만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통하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10년후에는 좀더 나은 자동차 디자인을 보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이만요.

    • Favicon of http://literarystudy.net BlogIcon huun 2011.05.11 14:18 신고  수정/삭제

      네...^^

      혹시 오해를 하신것이 아닐까 싶어 확인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래에 예를 든 말 중에,
      "10년전과 다를 바 없는 자동차의 디자인이 견딜 수 없게 하듯이 말이죠"라고 했던 것은, 실제로 자동차의 디자인이 10년전과 다르지 않다는 말로 조소를 한 것이 아니라, 만약에 10년전과 지금이 똑같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법으로 쓴 말입니니다. . .

      그리고, 예술가나 예술이나 은유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렇게 불쾌하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씀은 구체적인 예를 가지고 하셔야 오해가 없습니다.
      두리 뭉실하게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는 이세상"이라든가,
      "자아를 표현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 . .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아프게 만든다"라든가,
      "새로운 것을 보는데 급급한 나머지,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간다"라든가 하는 말들은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예술가들의 표현이 불쾌하면 안 보고 안 읽으면 됩니다. 상인들처럼 억지로 사라고 강매를 하는 것도 아니고, 실용세계화 정부처럼 강제로 배우라고 떠미는 것도 아닙니다. 공감도 되지 않는 걸 붙들고 불쾌하게 인생을 낭비할 필요는 없죠. 그 시간에 다른 즐거운 일을 하시는 것이 더 생산적입니다.

      불쾌감의 원인이 예술이나 예술가에게 있다고 보시기 전에, 본인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8. Glorious sound 2011.05.10 05:32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말씀하신 그대로가 저의 생각입니다.
    과연 우리는 왜 그러한 본성이 있는것인가에 대한 궁금한 마음에 글을 남겨보았습니다.
    저는 자동차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전혀 상관없을것 같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도구이기도 하고, 우리의 본성인 움직임을 가속화 시켜줌과 동시에, 나를 드러내고 자아를 표현하는 또하나의 수단으로 여겨지기에
    인간의 본성과 사회, 그리고 예술에 제가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시간내서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

    • Favicon of http://literarynote.kr BlogIcon huun 2011.05.10 22:10 신고  수정/삭제

      예술과 예술가들을 불신 하시는군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이죠...
      자기를 감추려고 은유를 쓴다면,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를 감추면서 소통하는 방법에는 오히려 은유가 적합치 않아보입니다(그와는 반대로 은유는 소통을 못하면서도 자기를 드러내니까요). 오히려 자기를 감추면서 소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상어"들이 아닐까 싶은데, . .

      단순히 말해, 은유는 사물을 새롭게 보고, 새롭게 경험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보시면 어떨지요. 매일 같은 걸 보고 겪어야 하는 병적인 일반적 상황에 놓여 있는 인간이 몸을 좀 뒤척여 보는거죠. 은유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어제와 같은 자세로 앉아서 보려는 게으름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10년전과 다를 바 없는 자동차의 디자인이 견딜 수 없게 하듯이 말이죠.^^
      예술가들을 존중해주세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9. Glorious sound 2011.05.09 08:36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답변 감사합니다.
    제 뜻은 '은유'라는 과정 자체가 가지는 이중성을 의미했던 것이었습니다.

    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반면에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

    이 두가지 마음이 공존하는것이 '은유'가 가지는 변태성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이것이 소통을 원하면서도, 직접적인 소통은 원하지 않는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어찌보면 오만하고 자기 만족적인 과정인 것 같았고
    진정으로 소통을 원한다기보다는 사실은 일방적인 소통을 원하는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예술에 대해 불쾌한 생각을 갖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예술을 전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

    • Favicon of http://literarynote.kr BlogIcon huun 2011.05.10 01:38 신고  수정/삭제

      은유를 쓰는 이유가
      자기를 은폐하고 감추기 위해서라는 건가요?
      소통은 하고 싶은데, 드러내기는 싫다?
      그것이 예술가들의 변태성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냥 알기 쉽게 직접 말하지, 왜 변태처럼 에둘러서 말하냐. . . 뭐 이런 말씀이세요?

  10. Glorious sound 2011.05.06 18:55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술은 은유 과정중의 쾌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혼자 하고 있다가 검색을 통해 여기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저는 자동차 디자인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어찌보면 살아있다는 그 사실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도 들지만, 왜 우리는 소통을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것이 매우 불쾌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그림이나 음악, 문학작품을 읽고 감동을 느끼는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혼란에 빠집니다.

    • Favicon of http://literarynote.kr BlogIcon huun 2011.05.09 03:05 신고  수정/삭제

      "소통을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다". . .음

      sound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통이라고 해서 하나의 소통만 있는 건 아니고, 쉽게 말하자면 아마도 어떤 소통이냐가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 .어떤 소통은 원하는데, 어떤 소통은 원하지 않는다 . . 뭐 이런 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