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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17 하나의 눈 (1)
  2. 2012.07.02 시간의 주름 (2)

하나의 눈

2014.01.17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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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잘 모르겠고, 오래 전에 63빌딩 수족관에는 수 백 년 나이를 먹은 거대한 거북이 한 마리가 사육되고 있었다. 우연히 그 수족관에 들르게 되어 우연히 그 거북이를 보았을 때, 난 처음으로 "다름"(alterity)이 무엇인지를 직접 깨달았다. 흐느적거리는 수족관 속을 헤엄치며 하얀 뱃살을 드러낼 때 몸 전체에 난 상처들과 주름들, 그 사이 사이에 얼룩져있는 찰과상의 흔적들, . . . 그것은 내가 막연히 생각 속에서만 숭고하게 품고 있었던 거북이 아니었다. 수족관에서 내가 본 것은 절대적 타자로서의 하나의 지속 또는 시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은 수년 전에 동생 집을 방문해서도 겪었다. 동생과는 가끔씩 연락은 했지만 오랫동안 서로 직접 만나지는 못했었다. 동생은 이미 결혼을 했고 두 아이와 아내가 있었는데, 내가 그 "일가"를 직접 만난 것은 큰 아이가 4살 정도 되었을 무렵까지였다. 그러니 내게 남아 있는 동생 가족의 기억은 실감 나지 않는 신혼과 매끈한 살결을 가진 갓난아이의 모습이 전부였다. 그러다 얼마 전에 동생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또 다시 "다름"을 직접 느꼈던 것이다. 아이들은 이미 훌쩍 커버려 내가 알고 있던 그 애들이 아니었다. 뽀얀 살집이 통통하게 붙어 있던 큰 애의 볼도 이제는 사라져 버렸고, 나를 바라보던 눈 빛에도 그 때의 그 순진무구한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그 갓난아이가 어느새 징그럽고 무뚝뚝한 학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집에 들어서자 집안 분위기 자체도 뭔가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어질러진 가재도구들, 여기저기 남아 있는 장판과 벽지의 얼룩들, 무엇보다도 문이 반쯤 열린 방과 주방에서 간간히 흘러 나오는 이 일가의 냄새는 잠시라도 앉아있기조차 어렵게 했다. 이들끼리 모여앉아 나누는 대화를 엿듣기라도 했다면, 나는 아마 그 집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 집안 구석구석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삶의 주름들, 잔물결, 잔무늬들이 진하게 얼룩져 있었고, 그 무늬들로 인해 나의 방문은 잔잔하게 퍼지는 동심원에 불쑥 날아든 돌멩이처럼 파문을 일으키고 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내 동생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에 진 주름만큼이나 고유한 자신만의 삶의 주름을 만들어가며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린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 후로 우리는 서로 연락도 뜸해지고, 거의 남남과 다를 바 없이 지내고 있지만, 미안해하던 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이든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어렵고 주변 사람들과 허물없이 쉽게 친해질 수 없는 이유는 타인의 삶에 진 주름의 깊이가 생각만큼 그렇게 얕지 않음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들의 삶에는 많은 주름이 패여있고, 점차 그 주름이 드러나면서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무늬가 서로의 관계 위에 떠오른다. 간혹 솔직하게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점점 흥미가 떨어지는 인물로 타락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드러낼수록 짙어지는 그 주름무늬가 이미 타인을 배제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주름을 감춘채 살고 싶어 하지만, 그들은 결국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더욱 많은 주름이나 상처를 안고 되돌아갈 것이다. 각자는 모두 살아온 만큼의 주름을 내포한다. 돌이킬 수도 지울 수도 없는, 또 바로 그 때문에 바로 자신일 수 밖에 없는, 아마도 물리학적 "복잡계"(complexity)에나 속할 주름들. 니체(F. Nietzsche)의 주사위 놀이에서처럼, 우리는 그 주름들 한복판에서 그것들을 딛고 일어설 수 밖에 없다. 니체가 말했던 삶의 긍정이란 그 주름으로부터의 절대적 해방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를 과거의 힘 속에 가두는 그 주름에 의해서만 "다시 미래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