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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과 물질 혹은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뒤죽박죽이다! 더 정확히는 지속의 물질화 혹은 시간의 공간화! 그리하여 삶 자체의 결정론적 기계론적 도식화!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정! 이것이 베르그송, 들뢰즈, 나아가 베르그송주의의 비판의 핵심이다. 시간을 공간으로 환원하는 많은 체계들이 있다. 가령, 운동을 운동체나 운동궤도와 뒤섞어 혼동했던 고전철학(아킬레스와 거북의 동질성), 시간을 공간의 좌표체계로 환원하여 공간을 주파하는 운동의 무의식적 단위로 혹은 상대적 좌표에 배열된 불연속적인 간격들로 파편화한 근대 과학(근대역학이나 상대성이론), 더 지독한 경우로는 마르크스가 '사물화 과정'이라고 말했던 것, 즉 효율적이고 용이한 대상으로 존재를 기능화하기 위해 그것으로부터 지속을 배제하여 순간적 상태로 환원하는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효율과 기능에 대하여 지속과 시간은 일련의 장애 즉 병적인 상태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는 지속의 모든 두께와 부피의 제거, 나아가 본성적 차이의 무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주의는 이러한 역사적 체계들 이전에,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도식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살기 위해 현실적 필요에 사로잡혀 있다. 지각은 현재 필요한 것만을 수용하고 나머지는 놓쳐버림으로써 사물로부터 그 온전한 실재성을 왜곡하거나 변형한다. 말하자면 지속과 시간을 현재의 필요로 수축시키는 것이다. 현실적 필요의 완성은 바로 행동이다. 행동은 세계를 당기고 밀고 휘어지게 함으로써, 행동의 주체를 세계의 중심에 설정하고, 실재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그 중심에 대한 상대적 존재로 집결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주의의 중요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결정론적 기계론적 사유로부터 시간을 되찾는 '기계'를 발명하는 일이다. 기계론과 결정론에 빠지지 않을 것! 현실적 필요에 사로잡혀 삶을 진부함 속에 가두지 않을 것! 존재로부터 그 고유한 시간, 과거, 지속 전체를 구해낼 것!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했던 것처럼 사회 경제적 소유관계의 재구성보다도 더 근본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가장 훌륭한 기계는 물론 예술이다. 들뢰즈가 생각하는 예술의 힘은 존재 고유의 시간의 보존에 있다. 예술에 관한 그의 대부분의 저작은 '존재의 본성적 차이와 긍정'이라는 주제를 기반으로 한다. 가령 운동, 지각, 감정, 충동, 행동, 지속이 영화 이미지에서 어떻게 자신의 고유한 형태로 현존하는지를 분류하여 그 이미지 각각을 긍정한다든지(『영화』의 경우), 현재와는 본성적으로 무관하게 과거가 그 자체 즉자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주어 과거, 기억, 시간 전체의 순수현존을 긍정한다든지(『프루스트와 징후』의 경우), 정신분석이 새도-마조히즘이라는 증후군으로 뒤섞어놓았던 두 작가의 고유한 문학 혹은 변태성을 본성적으로 다른 계열들로 나눈다(『마조흐: 냉정함과 잔혹함』의 경우). 존재의 긍정이란 현실적 사회적 관계 속에서 다른 존재와 뒤섞여 있는 동안에도 가지게 되는 권리상의 해방, 즉 존재가 그 자신 안에서의 시간 전체의 보존을 의미한다. 본성상의 차이의 발견과 존재의 긍정이라고 하는 들뢰즈의 예술론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잠재적 보존 그리고 그 직접적 현시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다른 형태로 질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속 혹은 시간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시계추의 반복처럼 공간에 끼어 있거나, 달리는 자전거처럼 운동에 실려 있거나, 표정 짓는 얼굴처럼 육체(물질)에 묻어 나오는 식의 간접적 현시 말고, 그들―육체, 기능, 운동, 현재―로부터 해방되어, 그들이 사멸해도 여전히 그 순수현존이 스스로 남아 직접적으로 현시되는 시간 그 자체의 이미지. 어떤 점에서 시간을 직접적으로 본다는 것은 과거를 그 즉자적 상태에서 본다는 것이다. 현재적 필요라든가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순수한 상태의 비전의 통찰! 이것이 잠재미학의 조건이며, 이로부터 현시되는 실상의 이미지는 결국 우리를 삶의 긍정으로 이끌 것이다.

시간(이미지)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가능성이 있는 현실적 이미지들이 있다. 들뢰즈는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와 같은 전후(戰後) 현대영화의 공통적인 형식을 '순수 시지각적 이미지'(image pure optique)라고 불렀다. 예컨대, 고전적 리얼리즘에서는 행동 중심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 계급이나 공동체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중심으로서의 주인공이 있고, 그를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자연적 환경이 있다. 그는 현실의 필요에 따라 환경을 지각하고, 그의 지각은 곧 행동으로 연결되고, 나아가 그의 행동성은 환경 전체의 변화로 이어져 삶의 새로운 조건이 탄생하는 식이다. 그러나 전후의 현대적 상황은 이러한 행동 중심의 도식(“환경1-행동-환경2”)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지각이 행동으로 혹은 행동이 다른 행동으로 혹은 행동이 환경의 변화로 연장되지 못하고, 그 사이에 중단, 망설임, 머뭇거림, 더듬거림과 같은 특이한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인 말이나 행동에 난데없이 끼어든 ‘공허’라든가, 일상적인 제스처가 중단되고 갑자기 무언가를 ‘주시’하며 순수한 관조에 사로잡힌 상태라든가, 여행이나 배회를 하는 가운데 맞닥뜨리게 된 어떤 ‘딜레마’, 익숙한 지각이나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는 참을 수 없는 광경의 ‘목격’, 낯선 풍경으로부터 감지하게 되는 ‘위기’ 혹은 막연한 ‘공포’, 이러한 관조적 이미지들은 현실에 행동성의 부재, 박탈, 균열을 끌어들인다. 행동이란 관념적 도식의 현재화 혹은 현재의 물질적 도식화인데, 이 도식 구도에 균열이 일어나 어떤 의도되지 않은 우연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순수한 시각적 청각적 상황에 내몰리게 되고, 나아가 관조적이 될 것을 강요받는다―한편 이 관조적 상황은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시간의 발생이며 창조의 징후이다.

관조적 상황에서는 모든 존재가 행위 주체에 종속되기를 그치고 그 고유한 실재성을 취한다. 말하자면 행동적 공간(리얼리즘적 공간)에서 세계를 견인하는 중력으로서의 중심에 난입한 균열로 인해, 관계하는 모든 사물을 특정 상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는 여행자나 떠돌이가 낯선 풍경에 직면하여 겪게 되는 모든 감각적 편력을 설명해준다. 생경한 비전에 빠진 여행자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모든 감각능력을 동원하지만, 사물들은 즉각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하거나 어떤 쓰임을 위해 기능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해방감을 주는 자연물처럼 의미가 미결정적인 상태에서 그 고유한 실재성을 드러낼 것이다(비스콘티의 영화들). 따라서 관조적 이미지에서는 주관성과 객관성, 상상과 실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식별 불가능해진다. 현실적 필요로부터 벗어나 필요가 야기하는 행동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특정한 목표에 따라 행위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미결정된 상태로 지연시킴으로써, 거기서는 구체화된 것도, 정향된 미래도 없으며, 추억이나 몽상 혹은 주관적 공허와 함께 객관적인 사실들이 소멸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들의 잠재성이 강화된다(안토니오니의 영화들). 관조는 잠재성의 열림 그 자체이며, 이는 우리를 사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실상의 구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인물들 대부분은 어린 아이라든가, 여성이라든가, 낯선 곳에 다다른 여행자라든가, 프롤레타리아와 같이 사회로부터 행동성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가 약자 혹은 소수자로서, 예술가나 작가가 그렇듯이, 사회적 행동 영역을 박탈당하여 상대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있다. 이러한 무기력이 그들로 하여금 난폭하게 드러나는 실상을 맞닥뜨리게 하고, 그들은 거기서 표현할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실재를 바라본다.

관조적 상황이 가장 절대적인 형태로 현시되는 이미지가 바로 오즈 야스지로의 그 유명한 “정물” 혹은 “베게-샷”(pillow-shot) 혹은 “정적”(cases of stasis)이다. 오즈의 정물은 인물들의 기계적이고 진부한 일상적 제스처들―집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술집으로, 술집에서 다시 집으로, 혹은 전형적인 말소리와 분위기의 대화―사이에 삽입된다. 그것은 간혹 고층건물로 나오기도 하고, 한적한 공원이나 공터의 자연물, 도시의 작은 골목이나 술집 네온사인, 산이나 바다의 먼 곳, 실내의 텅 빈 복도, 방안의 가구들, 특히 방 안에 배치된 꽃병, 골프채, 술병, 책, 책상, 스탠드, 복도와 벽에 비치는 물그림자, 밤길을 비추는 가로등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들뢰즈는 이 정물이미지가 이탈된 공간이라고 지적하였다. 장면들 간에 연결되는 공간도 아니고, 행동의 매개가 되지도 못하며, 행동하는 인물이 배치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야기의 흐름이나 인물들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임의로 설정된 일종의 균열이다. 행동에 적합하게 설정되어 움직임이나 시지각 대상에 종속된 리얼리즘적 공간이 아니라, 연결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순수하게 자율성을 가지는 탈구 상태, 더 정확히 그 자체 지나가는 어떤 것, 즉 이미지에 담긴 특정 대상과도 무관한 지속 그 자체의 직접적인 이미지이다. 들뢰즈는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예로 든다: “『늦봄』에서의 그 꽃병은 딸의 온화한 미소와 복받쳐 오르는 눈물의 장면 사이에 삽입된다. 무엇인가가 생겨나고 변하고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의 형식은 그 자체 달라지지 않았고, 지나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시간, 시간 그 자체, ‘그 순수한 상태의 자그마한 시간’이다. . . . 오즈의 정물은 지속한다. 그 10초 동안의 꽃병이라는 하나의 지속을 취한다. 그 꽃병의 지속은, 변하고 있는 상태들의 연속을 통해, 정확히 바로 그 견디어내고 있는 것의 표상이다.”

사실상 삶을 지배하는 것은 여행이나 배회가 아니라 일상적인 작은 행위들이다. 오히려 여행조차 일상의 한 이면의 반복일 정도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곳은 어김없이 전형적이고 진부한 공간(고궁, 온천지, 술집, 가정, 직장)이며, 우리의 대화 역시 대본이 마련된 퍼포먼스처럼 진부한 말소리와 분위기로 채워진다. 우리는 모두가 아주머니, 아저씨, 아들, 딸,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서 판에 박힌 캐릭터로 살아간다. 들뢰즈가 명명했던 이 “무료한 시간들”은 삶을 변화로 이끌지도 주어진 상황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지도 못한다. 고요한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들, 가령 딸의 결혼식이 끝나고 혼자 숨죽여 흐느끼는 아버지의 서글픔(『꽁치의 맛』), 잠든 아버지를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딸의 연민(『늦봄』), 죽은 아버지에 대해 모질게 말을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딸의 애증(『마지막 변덕』), 심지어 죽음조차도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슬픔과 눈물 역시 결국은 진부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진부함은 삶 자체 나아가 대자연의 본성에 기인한다. 자연은 빈틈없는 규칙에 따라, 필연적 질서에 따라, 하나의 항에서 다른 항의 연쇄로, 거대한 방정식의 이항(移項)과도 같은 계열들의 움직임으로 짜여있다. 자기중심적으로 부분만을 지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에게 이 질서는 부서지고 혼란한 형태의 작은 단편들로만 보이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진 많은 것들이 우연적이며 특이한 경험이 된다. 일상의 한 국면이 다른 국면과 마주치면서, 마치 그 가운데에 침입한 드라마처럼, 그 국면들이 놀라운 사건이나 강렬한 첨점으로 보이는 것이다. 신의 지각에서 본다면 아주 단순하게 해명 될 만한 자연적 질서의 사소한 단편이 인간에게는 거대한 재앙으로 보이거나, 타인과의 우연한 만남조차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운명의 외관을 취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감동은 자연의 풍경에서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수학과도 같은 단순한 자연에 자신의 혼란한 감정을 투영하여, 그 지루한 일상적 규칙으로부터 벗어나 풀길 없는 격정을 만들고자 한다. 친구들의 농담(『꽁치의 맛』)이나 음흉한 익살(『가을햇살』) 혹은 시위 하듯 친정에 와서 살고 있는 여인의 남편에 대한 반항(『동경의 황혼』)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과 마음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대자연의 고전주의에 맞선 기약 없는 낭만주의의 반항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간 어머니 때문에 생긴 동생의 깊은 상처를 깨달은 언니가 자신의 어린 딸을 생각하여 다시 남편에게 돌아갈 것을 결심하듯, 혹은 아버지가 딸의 죽음을 겪고 난 후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되어 거대한 산이 환하게 드러나고 나무 그림자가 실내 복도를 드리우자 넥타이를 매고 새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가듯, 거스를 수 없는 막대한 힘 앞에서 굴복하고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무기력한 반항일 뿐이다. 때문에 우뚝 솟은 나무나 눈 덮인 산, 잔잔한 대양(大洋)의 장엄은 우리의 낭만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낭만주의가 빚어낸 요란한 동요와 혼란을 아무 말 없이 태연한 일상으로 되돌릴 뿐이다. 자연을 바라보며 우리는 떠나왔던 바로 그곳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또한 낭만주의자들이 간혹 산의 이미지에서 느끼는 무지막지한 대자연의 숭고이다.

바로 여기에 정물의 이미지가 가지는 심오함이 있다. 정물은 지나가는 그 무엇을 직접적으로 현시한다. 하루의 일상적 사건이 생겨나고, 밤이 되어 하루 동안의 동요를 추스르고 잠에 빠지듯, 정물은 사물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간의 잠재적 이행을 시각적으로 보존한다. 잠든 인물의 의식이 희미해지거나 꺼져있는 동안에도 날들은 스스로 보존되어 밤과 새벽을 지나 또 다른 날들로 운반될 것이다.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되어 해가 뜨거나, 외출에서 돌아와 잠시 앉아 있는 동안, 잠시 동안의 시간의 변화가 그 정물 안에서 잠재적으로 일어난다. 공간을 이동한 것도 달라진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정물은 시간을 일정한 부피와 두께로서 보존한다. 빛, 명암, 색채 및 실재 전체가 겪는 변화의 구도! 의식적이고 행동적인 지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형상의 미묘한 질적 변화! 이것이 바로 정물이며 시간 그 자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물의 심오한 가치는 삶을 견디어내어야 할 그 무엇으로 체험하는 인물들의 내적 지속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오즈의 영화에는 많은 사회적 변화의 환경이 깔려 있다. 산업사회 혹은 패전의 절망, 전통적 가치의 변화와 붕괴, 이러한 변화를 가장 첨예하게 보존하는 장소로서의 가족과 이웃, 거기서 우리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참을 수 없는 형태의 실상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오즈의 이미지의 가치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의 기저에 있는 말해지지 않은 어떤 실상의 목격이다. 가정으로 난입한 산업(『동경이야기』), 의식의 변화(『부초이야기』), 전통과 현대 혹은 세대의 변모와 갈등(『꽁치의 맛』, 『부초이야기』, 『가을햇살』), 패전이후의 달라진 관계들(『꽁치의 맛』)과 같이, 일본인들의 잔잔한 일상 속에 들이닥친 현대성의 병리적 징후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삶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것―욕망, 이별, 죽음 등―을 견뎌내어야 하는 고통을 안고, 인간은 삶 자체에 내재한 참을 수 없는 슬픔에 파묻혀 있다. 아름다운 영화 『동경의 황혼』 마지막 장면에서 딸이 죽은 후 밤을 샌 아버지가 맞는 아침의 대기에는 그처럼 가늠하기 어려운 힘겨운 슬픔이 배어있다. 오즈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여 정물을 통해 환기되는 이 슬픔의 정서는 무엇인가를 견디고 기다림으로써만 완성될 수 있는 시간 그 자체의 직접적인 계시이다. 결국 다시 대면 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새벽을 마중하기 위해, 아니면 대자연의 바람 속으로 흩어지기 위해, 삶과 인간에 대해 그 어떤 질문도 유보한 채 조용히 앉아 자기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우여곡절로 인해 빠져나와 버린 일상적 동요가 눈 덮인 산과 고요한 나무를 닮아가며 대자연의 질서로, 빠져나갈 수 없는 그 무지막지한 방정식의 한 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추스른다. 본질적으로 시간은 기다림(혹은 망설임)을 통해서만 체험된다. 특정 대상에 대한 상대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기다림, 즉 자신의 몸뚱이와 과거전체를 직접 짊어지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번민과도 같은 절대적 기다림이다. 오즈의 정물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정물은 시간-지속-기다림 그 자체인데, 그 기다림에는 하이쿠(俳句)에서의 기레지(切字)가 자아내는 일본 특유의 영탄(詠歎)―지성의 질문과 부정을 통해 존재의 이해에 도달하려는 서구의 지성과는 대조적인―에 비견할만한 삶과 존재의 긍정이 주는 슬픔이 있다. 정물은 그 자체 견디어내는 시간, 견딜 수 없는 내적 동요나 감당할 수 없는 근원적 슬픔을 삭이는 시간이다. 그것은 개인이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지속-이미지이다. 세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에 봉착한 네오리얼리즘의 사유의 시간과는 다르게, 오즈의 정물에는 하염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애달픔의 시간이 있다. 설탕이 물속에서 녹아내리고 물이 끓어 수증기가 피어올라 대기에 퍼질 때까지(『창조적 진화』), 어머니라고 하는 한 사회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한 여자 한 인간 나아가 자연이라는 존재론적 수용에 도달할 때까지(『가을햇살』), 죽음을 자연의 한 흐름으로 수용함으로써 슬픔을 가눌 수 있을 때까지(『동경이야기』, 『동경의 황혼』),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욕망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포기할 때까지(『부초이야기』, 『가을햇살』, 『꽁치의 맛』), 개인은 기다림 속에서 자신을 초월한 ‘비개인적인 시간’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관조의 시간’이 최종적으로 이르게 될 일원론, 베르그송주의자 들뢰즈가 말했던 ‘지속의 세 번째 단계’, 즉 물의 흐름과 새의 비상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하는 단 하나의 시간이다.

우리는 내면화된 구조와 법칙에 따라 사물을 인지하고 느낀다. 지각과 행동의 대상은 현실적 필요와 흥미를 반영하는데, 우리는 실재의 다양한 측면들 중에서 흥미롭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을 지각에서 제외한다. 자연에 대한 이 편협한 이해는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라든가, 이데올로기적 믿음, 심리적 요구에 따라, 삶의 요구에 적합한 것만을 수용한 결과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판에 박힌 것’만을 지각하고, 또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진부하고 판에 박힌 연쇄에 균열이 생긴다면 어떨까? 네오리얼리즘의 풍경이나 오즈의 정물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 이미지들은 일상적이고 도식적인 진부함 속에 난입한 단절과 균열이며, 행동적 현실의 파탄과 붕괴이다. 그러나 한편 그 균열은 편협한 행동-도식이 놓쳐버린 어떤 실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지각 가능한 현실을 넘어서고, 행동보다 더 근원적이고 강렬한 어떤 것의 현시. 실상이란 판에 박힌 인식에서가 아니라 도식화할 수 없는 어떤 것 속에서, 낭만주의자들이 숭고한 자연과의 대면에서 그랬듯이 능력의 불일치와 부조화 속에서, 능력들 각각이 해방되어 반(反)기능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즉 알려진 것 외부의 잠재성 속에서 탄생한다. 네오리얼리즘이나 오즈의 이미지는 모두가 잠재적 세계, 즉 가시적이고 결과적인 것 ‘이전’ 혹은 그 ‘이후’의 저편에 은밀하게 내재하는 투시적 세계를 향해있다. 그것은 ‘견딜 수 있는’ ‘허용 가능한’ 지각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습관적 도식이 되어버린 망막의 기능을 효력 정지시켰을 때에만 희미하게 현시되었다가, 우리가 생활의 요구로 돌아갈 때 다시 꺼져버리는 과잉의 세계이며 절대적 타자성의 세계이다.

따라서 실상의 투시는 이미지의 존재론이 정치학으로 나아가는 길과 멀지 않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이미지란 실재 그 자체이다(“우리는 사물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물을 지각한다”). 이미지가 기만적이고 실상을 왜곡하는 부정적 존재라면, 그것은 이미지로부터 흥미로운 것만을 취해 이미지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을 수용하는 우리의 판에 박힌 지각과 행동의 악습 탓이다. 거기에는 그 악습이 초래하는 삶의 진부함을 필요로 하고 이용하고 조장하는 현실적 이해관계 혹은 권력이 있다. 삶의 기만을 꿰뚫고 그로부터 단절하려면, 그 무엇도 덧붙이거나 빼지 않은 채 이해관계와 권력이 덧붙여 놓은 색채들을 소거시키고 비워내어 진상을 투시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과 기만에 맞선 피로한 투쟁이나 구호 그리고 그 힘을 얻기 위한 휴머니즘적 감동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그것은 어쨌든 또 하나의 행동성으로 뒤섞일 것이고, 나아가 또 다른 진부함의 상태로 떨어져 버릴 테니까. 결국 진정한 이미지는 물질과 공간의 도식으로부터 시간을 해방시킬 때에만 현시될 것이다. 이미지가 단지 감각적 운동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아도 혹은 가시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담장에 기대어 서 있을 때조차 그 고유의 존재성을 보존하는 자전거처럼, ‘읽혀지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읽는다는 것은 사물로부터 잠재적인 것, 즉 과거 전체를 끄집어내는 활동이다. 읽기는 사물의 현재성을 과거로 되돌린다. 그리하여 우리의 현실적 필요 때문에 지각이 왜곡시킨 존재의 고유한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물론 읽기에 머물지 않고 쓰기(아상블라주)로 더 나아가야겠지만 말이다. 이미지는 그 전체가 읽혀져야 하고, 이 독서 자체가 바로 이미지에 지속을 부여한다. 이것이 들뢰즈가 베르그송주의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세계에 ‘문학성’을 부여하는 직관의 잠재적 역량―신비주의적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음을 배제하지 않는―이 아닐까?

감각과 운동을 넘어 참된 시간의 이미지로 열리는 잠재미학의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 우선 이미지는 공간, 감각, 물질의 관계를 벗어나야만 하고, 나아가 운동성으로부터 단절하여 바라보는 단계가 필요하며, 필요와 관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미지의 부분만을 지각하는 편협한 단계를 지나 해방된 지각으로 이미지 전체를 읽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지속과 시간의 진정한 이미지는 우주가 책이 되어가는 과정과 나란히 공존한다. 그러나 독서는 진부하고 판에 박힌 세계로부터 실상을 추출해 낼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로는 판에 박힌 세계의 해방일 수는 없다. 그를 위해서는 다른 역량, 즉 무한한 관계 이미지의 구성으로 사유를 전개하는 쓰기의 역량과 연계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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