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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0.24 지속과 역사
  2. 2012.07.02 시간의 주름 (2)
  3. 2008.11.22 지속(Duration) 안에서의 포함(encompass)의 한 예

지속과 역사

2013.10.24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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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잘 모르겠고, 오래 전에 63빌딩 수족관에는 수 백 년 나이를 먹은 거대한 거북이 한 마리가 사육되고 있었다. 우연히 그 수족관에 들르게 되어 우연히 그 거북이를 보았을 때, 난 처음으로 "다름"(alterity)이 무엇인지를 직접 깨달았다. 흐느적거리는 수족관 속을 헤엄치며 하얀 뱃살을 드러낼 때 몸 전체에 난 상처들과 주름들, 그 사이 사이에 얼룩져있는 찰과상의 흔적들, . . . 그것은 내가 막연히 생각 속에서만 숭고하게 품고 있었던 거북이 아니었다. 수족관에서 내가 본 것은 절대적 타자로서의 하나의 지속 또는 시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은 수년 전에 동생 집을 방문해서도 겪었다. 동생과는 가끔씩 연락은 했지만 오랫동안 서로 직접 만나지는 못했었다. 동생은 이미 결혼을 했고 두 아이와 아내가 있었는데, 내가 그 "일가"를 직접 만난 것은 큰 아이가 4살 정도 되었을 무렵까지였다. 그러니 내게 남아 있는 동생 가족의 기억은 실감 나지 않는 신혼과 매끈한 살결을 가진 갓난아이의 모습이 전부였다. 그러다 얼마 전에 동생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또 다시 "다름"을 직접 느꼈던 것이다. 아이들은 이미 훌쩍 커버려 내가 알고 있던 그 애들이 아니었다. 뽀얀 살집이 통통하게 붙어 있던 큰 애의 볼도 이제는 사라져 버렸고, 나를 바라보던 눈 빛에도 그 때의 그 순진무구한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그 갓난아이가 어느새 징그럽고 무뚝뚝한 학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집에 들어서자 집안 분위기 자체도 뭔가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어질러진 가재도구들, 여기저기 남아 있는 장판과 벽지의 얼룩들, 무엇보다도 문이 반쯤 열린 방과 주방에서 간간히 흘러 나오는 이 일가의 냄새는 잠시라도 앉아있기조차 어렵게 했다. 이들끼리 모여앉아 나누는 대화를 엿듣기라도 했다면, 나는 아마 그 집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 집안 구석구석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삶의 주름들, 잔물결, 잔무늬들이 진하게 얼룩져 있었고, 그 무늬들로 인해 나의 방문은 잔잔하게 퍼지는 동심원에 불쑥 날아든 돌멩이처럼 파문을 일으키고 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내 동생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에 진 주름만큼이나 고유한 자신만의 삶의 주름을 만들어가며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린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 후로 우리는 서로 연락도 뜸해지고, 거의 남남과 다를 바 없이 지내고 있지만, 미안해하던 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이든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어렵고 주변 사람들과 허물없이 쉽게 친해질 수 없는 이유는 타인의 삶에 진 주름의 깊이가 생각만큼 그렇게 얕지 않음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들의 삶에는 많은 주름이 패여있고, 점차 그 주름이 드러나면서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무늬가 서로의 관계 위에 떠오른다. 간혹 솔직하게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점점 흥미가 떨어지는 인물로 타락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드러낼수록 짙어지는 그 주름무늬가 이미 타인을 배제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주름을 감춘채 살고 싶어 하지만, 그들은 결국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더욱 많은 주름이나 상처를 안고 되돌아갈 것이다. 각자는 모두 살아온 만큼의 주름을 내포한다. 돌이킬 수도 지울 수도 없는, 또 바로 그 때문에 바로 자신일 수 밖에 없는, 아마도 물리학적 "복잡계"(complexity)에나 속할 주름들. 니체(F. Nietzsche)의 주사위 놀이에서처럼, 우리는 그 주름들 한복판에서 그것들을 딛고 일어설 수 밖에 없다. 니체가 말했던 삶의 긍정이란 그 주름으로부터의 절대적 해방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를 과거의 힘 속에 가두는 그 주름에 의해서만 "다시 미래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이 지속에 부여한 분할과 연속의 힘보다, 더 심오하고 더 훌륭한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힘(the power to encompass itself)"이다.

. . . 물의 흐름, 새의 비상, 내 삶의 속삭임은 세 가지 흐름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나의 지속이 그 흐름들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나머지 두 흐름들을 포함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왜 두 흐름은 안 되는가? 가령, 나의 지속과 새의 비상은 왜 안 되는가? 왜냐하면 두 흐름은 세 번째의 다른 흐름 안에 포함되지 않으면 공존한다거나 동시적이라고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새의 비상과 나의 지속이 동시적이 되려면, 나의 지속이 둘로 나뉘어져야 한다. 그래서 나뉘어진 또 다른 지속이, 새의 비상을 포함하고, 동시에 나의 원래 지속도 포함함으로써, 나뉘어진 지속 안에서 원래의 지속이 반영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흐름들의 근본적인 삼중성이 있다.(Bergsonism, 80)

지속 안에서의 포함을 설명해주는 한 가지 예가 있다. 영화학자 Bela Balazs는 이 포함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 ... ] 하나의 멜로디는 시간의 차원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면 첫 음이 그 멜로디의 한 요소가 되려면, 오로지 그 첫음이 다음에 나올 음을 지시해야만 하고, 분명히 그 첫음이 계속 이어지는 다른 음들과 관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음은 아직 얼마간은 연주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미 첫 번째 음 속에 멜로디를 자아내는 요소로서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음이 나와 그 멜로디가 완성되려면, 우리가 그 멜로디를 따라 들으면서 그 첫 번째 음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 음들은 시간의 연속 속에서 다른 것이 나오면 그에 잇따라서 소리가 난다. 따라서 그 음들은 하나의 실제적인 지속이 있다. 그러나 멜로디의 일관된 선율은 시간의 차원이 아니다; 그 음들의 서로간의 관계는 시간 속에서 연속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그 멜로디는 점진적으로 시간의 경과에 따라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첫 음이 연주 되자마자 이미 하나의 완전한 실체로서 존재성을 갖는다.(Bela Balazs, Theory Of The Film, 1952, "Melody and Physiognomy" 중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그 안에 바로 그 다른 하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의 멜로디가 가능하려면, 그 멜로디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음들이 다른 음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지속이란 잇따르는 것들의 집합이 아니라 포함 관계로 정의할 수 있다. 실질적 지속이란 거짓된 연속이 아니라, 즉 따로 떨어진 것이 연속의 효과만 내는(만화, 몽따쥬처럼) 것이 아니라, 물의 흐름처럼 실제의 연속이다. 이 포함관계를 윤리적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뭔가를 느낀다면, 그 대상속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내 안에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물에서 신을 보고, 신에게서 인간을 보는 것은, 우리 안에 신이 있거나, 사물 안에 신이 있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를 느끼는 활동은 대상을 내 안아서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말의 윤리적 정의가 이것이다.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시간 속에서의 공존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