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4.08.30 노동과 병
  2. 2014.06.09 타인과 도시 (1)
  3. 2013.04.21 요제피네의 휘파람 (3)
  4. 2009.01.28 어색한 포즈와 불안 (15)
  5. 2007.09.20 세이렌(Seiren), 즉 포스트모던 신화
  6. 2006.08.20 은행에서 본 어느 조각상

노동과 병

2014.08.30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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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도시

2014.06.0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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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피네의 휘파람

2013.04.21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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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洞) 사무소나 구청 같은 곳을 가보면, 어딘지 내 자신이 어색한 포즈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이곳에 왔는지를 떠올리며 두리번거리거나, 나의 용무를 맡아줄 공무원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하거나, 어떤 서류를 집어 들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라면 익숙해지겠지만, 그곳은 언제든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부름에 의해 가게되는 곳이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잊고 지내는 곳이며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마찬가지로,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나 새내기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와 같은 어색한 포즈들을 금새 발견할 수가 있다.

이는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더 절실히 느껴보았을 것이다. 훈련병 시절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이 행위가 끝나고 나면 어떤 행위를 해야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 동작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또는 다른 무엇인가의 요구였다. 군대가 훈련병들에게 반복해서 숙지시키려는 것은 개인에 앞선 체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군대는 개인에게 모든것을 포기할 것을 끊임없이 권고한다. 이런 이유로 거의 모든 초년병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색한 몸짓은 바로 의지와 포기의 딜레마에 처한 한 개인의 망설임에 기인한다. 고참이 된 후 내 동료는, 뽀얀 살결을 드러내며 잔뜩 겁에 질려 막 들어온 초년병을 보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신참들은 왜 저렇게 한결 같이 똑같지? 다들 겁먹은 얼굴을 하고, 사지가 얼어붙어 뻣뻣하니 말야! 저 우스꽝스럽게 걷고 있는 놈들을 좀 보라구!"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이 의기양양함 이면에는 포기하기로 작정한 한 인간의 서글픔 같은 것이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uderborg)가 감독한 <카프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카프카는 문서의 형태로 성(城)의 부름을 받는다. 여차 저차 하여 그는 성의 문서고에 있는 서랍장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성에 들어간 카프카의 행적을 담은 몇 개의 시퀀스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신병이라도 된 듯이, 아니면 동사무소에 막 들어간 우리 자신처럼, 여기저기를 서성이며 수상한 포즈를 연출한다. 누가 자신을 부른 것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 . .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들키지나 않을까 숨어보기도 하고, 인기척이 들리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얼어붙는다.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는 대체로 저 어색한 포즈를 욕망의 언어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몇 안 되는 연기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서툴고도 수상한 포즈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언제든지 그 불안은 서스펜스를 불러들이며, 이 영화가 주는 재미란 바로 그 서스펜스에 있다. 히치콕(Alfred Hitchcok)은 서로 관계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던 두 힘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는 경향성을 띠고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거나, 균형 잡힌 계획이 깨어질 것을 예고하는 방식으로 서스펜스를 창조한다. 인물들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면서, 한 편에는 이와 동일한 양의 반 테제의 힘에 직면한다. 가령, <이창>에서 범인을 속임수로 유인하고 그의 집에 숨어들어 증거를 찾는 장면이라든가, <사보타지>에서 길 한가운데 멈춘 자동차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다른 자동차의 서스펜스라든가, 자유의 여신상에서 하강운동과 상승운동을 봉합했던 소매가 점점 튿어지는 쇼트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가 파국에 대한 관객의 두려움을 담보로 하여 숨막히는 줄타기 곡예와도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그 서스펜스의 심층에는 불안이 내재한다. 물론 그것은 인물의 불안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관객, 즉 그 곡예를 목도하고 있는 자의 불안일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uart)의 불안한 눈빛은 도래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은 그 자신의 것이기보다는(이미 그는 목격하고 있으므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불안을 의미한다.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항상 프레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언제든지 저 바깥쪽이 문제이다.

따라서 수상하거나 서툰 몸짓은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예증하고 있다. 어떤 두려움? 익숙한 것, 자동화된 것, 매끈한 것이 파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대부분의 서스펜스 장르는 자동화된 현실과 그 파국이라는 두 테마를 하나의 구도 안에서 동시에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가지 특이한 예로, 이 불안과 두려움을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표현했던 사람이 바로 채플린(Charlie Chaplin)이다. 그는 순수하게 유쾌한 유머를 구사했던 사람은 아니다. 채플린의 웃음에는 통쾌함이 있기 이전에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유쾌한 해학은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맨 나중에 모든 것이 파국으로 돌입하는 순간 발생한다. 이 파국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사람이 히치콕이라면, 채플린은 이를 기꺼이 드러냄으로써 불안을 웃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예로, <모던 타임즈>에서 떠돌이의 서툰 몸짓은 제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 나사못이 됨으로써, 생산라인을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에는 공장 자체를 파괴하게 된다. 그는 자동화된 몸짓(혹은 사유)을 불안과 견주어 지연시키는 대신에, 궁극적인 파국을 통해 그 자동성을 비웃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카프카나 히치콕 혹은 채플린의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은 파국적인 상황에 대한 예고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상한자를 발견하는 일이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을 주로 매체나 허구를 통해서만 경험한다. 그리고는 이 경험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주로 매체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것에 대한 환각을 통해 어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환각적인 것이 현실적인 믿음이 되려면, 우리 자신의 현실이 자동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환각이 더 현실적으로 보일수록 우리는 이미 모든 것에 익숙하게 행동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일상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길거리를 다니고, 출근을 하고, 지하철에 앉아 있는 우리 자신을 보라. 수상하거나 어색한 몸짓의 소유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공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어디를 가든 이미 수상하거나 서투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낯선 공간에서조차 금새 그 코드를 해독하여 익숙해 질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흄(David Hume)이 과학적 현실에 대해 그렇게 말했듯이,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물이 떨어지고, 별이 뜨는 것처럼, 확고하고도 안정적인 현실을 만드는 것은 바로 반복과 자동이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라든가, 러시아 형식주의자라든가, 아니면 벤야민(Walter Benjamin)이라도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현대의 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이 예술을 통해 낯선 장치(alienation)들을 고안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익숙하여 자동화된 소외(alienation)에 대한 의식의 대항이었다.

익숙함이 몸에서 일기 시작하면 모든 일들이 마치 죽음 본능에 마취된 듯이 너무나 쉬워지며 편안해 진다. 그러나 이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그와 동일한 양의 불안과 공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공 교육이 한창이던 내 초등학교 시절 최대의 사건은 간첩에 대한 소문이나 삐라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뿐 아니라 지금도 역시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반공체제의 편안한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간첩이나 삐라는 반드시 있어야한다. 그것은 마치 공통의 적(敵)이 설정되고 나면 우정이 돈독해지고, 나아가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공통의 적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허구나 조작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환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언제든지 불안과 공포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면서도 요구했던 것이다. 불안의 강도는 바로 저 편안한 육체의 강도와 정확히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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